국가 대표팀과 국민 정서의 상관관계 : 영국, 아르헨티나, 스페인, 독일
축구 대표팀은 국민 정서를 좌우하는 상징적 존재로 여겨지며, 경기 결과는 곧 국가적 분위기에 직결되곤 합니다. 축구의 종주국이라 불리는 영국의 경우, 대표팀이 큰 대회에서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둘 경우 언론과 여론이 들끓으며 정부까지 압박을 받는 양상이 반복돼 왔습니다. 예를 들어, 유로 2016에서 아이슬란드에 패한 후, 영국 언론은 “국가적 수치”라며 맹비난을 퍼부었고, 브렉시트를 앞둔 정치적 불안정 상황과 맞물려 사회 분위기마저 어두워졌습니다.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못지않은 축구 열정을 지닌 나라로, 대표팀의 성적은 마치 국가의 존엄성과 직결된 듯 여겨집니다. 1986년 마라도나의 ‘신의 손’ 골로 월드컵을 제패했을 때, 국민 전체가 하나 된 감동을 경험했고, 이는 1982년 포틀랜드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는 데도 큰 심리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스페인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우승 이후 바르셀로나 독립 문제 등으로 분열돼 있던 내부 정서를 잠시나마 통합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카탈루냐 출신인 피케와 이니에스타, 그리고 마드리드의 카시야스가 함께 우승을 만들어낸 것은 단순한 승리를 넘어, 지역 갈등을 초월한 스포츠적 이상을 보여주는 순간이었습니다. 독일은 대표팀의 성공을 통한 국민 단합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특히, 2006년 자국 월드컵은 ‘여름 동화(Sommermärchen)’로 불리며, 동서독 통일 이후 아직 갈등이 남아 있던 사회에 희망과 자부심을 심어주었습니다. 2014년 브라질에서의 월드컵 우승 역시 난민 수용과 유럽 통합이라는 정치적 도전에 직면한 독일 사회에 긍정적 에너지를 제공했습니다. 이처럼 축구는 각국에서 정치와 사회의 정서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독재 정권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의 정치 선전 수단
축구는 대중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에,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는 체제 선전과 정당화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입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비델라 군사독재 정권 하에 있었고, 국민들에 대한 처벌과 압박이 일상화된 암흑기였습니다. 비델라는 월드컵 유치를 기회 삼아 국제 사회의 비판을 덮고, 국민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축구를 적극적으로 정치화했습니다. 심지어 네덜란드와의 결승까지 가는 과정에서 페루와의 경기에서 6-0 승리를 거둔 것을 두고, 언론에서는 정치적 거래와 승부조작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결승전이 열린 날,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비밀 구치소에서는 일부 시민들에 대한 강제 구금이 계속되고 있었던 현실은, 축구가 어떻게 정치 선전에 이용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사례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34년, 무솔리니 정권은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통해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 강한 압박을 가했고, 경기 전날 선수들에게 “이기지 못하면 죽는다(Vincere o morire)”는 말까지 전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결국, 이탈리아는 결승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꺾고 우승에 성공했고, 이는 곧 무솔리니의 ‘승리’로 국내외 언론을 통해 선전되었습니다. 이후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유니폼에 검은 셔츠(무솔리니 체제 상징)를 입고 출전하며, 축구장조차 정치 무대로 활용했습니다. 이처럼 축구는 때로는 정권의 미소 뒤에 감춰진 선동의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정치 갈등을 치유한 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는 정치적 갈등을 치유하고, 극적인 평화의 상징이 된 사례들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장면은 2005년, 영국 프리미어리그 첼시의 대표적인 공격수 '디디에 드로그바'가 코트디부아르 월드컵 본선 진출 직후 보여준 행동이었습니다. 당시 나라 안팎에서는 북부 반군과 정부군 간의 내전이 3년째 계속되고 있었고, 국민은 절망과 피로에 빠져 있었습니다. 경기 직후, 드로그바는 카메라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총을 내려놓고 평화를 달라”라고 호소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전 국민에게 전해졌고, 며칠 후, 코트디부아르는 역사적인 휴전 협정에 서명합니다. 이후 대표팀은 반군 지역인 부아케에서 친선경기를 열어 국민 통합을 상징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축구가 어떻게 전쟁조차 멈추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이외에도 정치적 적대감이 높은 나라들 사이에서 열린 경기에서도 감동적인 스포츠맨십이 확인된 순간들이 있습니다. 2018년 월드컵 예선에서 이란과 미국이 다시 맞붙었을 때, 양 팀 선수들은 경기 전 유니폼을 교환하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미국 대표팀은 꽃을 건넸고, 이란 선수들은 웃으며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정치와 별개로 인간 대 인간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북한과 일본의 경기에서도 항상 긴장감이 가득했지만, 2004년 아시안컵 예선에서 일본 선수들이 경기 후, 북한 선수들에게 존중의 악수를 청하고 유니폼을 교환했던 모습은 굉장히 인상 깊은 장면으로 남아있습니다. 또한,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 대한민국과 북한이 맞붙은 2010년 월드컵 예선에서, 대한민국 감독 허정무는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며 감정을 자극하는 언행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고, 북한 감독 김정훈도 경기 후 “축구는 스포츠일 뿐, 정치가 아니다”라며 상호 존중의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이처럼 축구는 전쟁보다 강한 공감과 연대를 이끌어내며, 냉각된 외교를 잠시나마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